소나무 소리가 들리지 않거든
오뉴월 햇볕 아래 완두콩 꼬투리가 터지듯 눈이 떠졌다. 12:08, 어렵게 눈을 붙인 지 겨우 한 시간여가 지난 시각. 서너 해 전 얻은 고약한 잠버릇이다. 창밖에 후드득 하는 게, 비가 오는 모양이다. 블라인드를 젖혀 보았다. 비다. 일 년 내 목마른 도시에 귀한 비가, 그것도 제법 굵게 내리고 있었다.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나버렸고,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다시 쉬 잠들기는 글렀다. 비는 종종 현실감각을 무디게 한다. 다가오는 하루를 무리 없이 보내려면, 잠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차 한 잔을 만들어 책상에 앉았다. 그새 더 굵어진 빗발이 창에 부딪히면서 내일에 대한 걱정을 흘려보내고, 어제를 불러내고 있다.
대여섯 살쯤, 산과 들, 개울을 놀이터 삼아 놀 수 있었던, 동화 같은 시골 마을에 산 적이 있다. 그 무렵 한 초여름 날, 토끼풀꽃을 뜯으러 숲에 나갔다 소나기를 만났다. 나무 사이 널따랗게 퍼져있는 잡풀 틈에, 새침하게 숨어있는 다홍빛 산나리를 정신없이 쫓고 있을 때였다.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비가 쏟아지는 숲속,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 사이에서 당황해 있던 나. 솔잎이 그나마 촘촘하게 늘어져 있던 한 소나무로 뛰어갔다. 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비가 긋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빗방울이 땅에 튈 때마다 매캐한 냄새가 머리 깊숙이 파고들었다. 흙냄새였다. 그때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 지금까지도 비가 오면 도심 한가운데,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도 그 흙냄새를 느끼곤 한다. 그렇게 기억에서 풀려난 흙냄새는, 이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며 잠자코 있던 기억을 들쑤시기 시작한다. 오늘도, 어디 모서리에 뜯겨 구멍 난 털스웨터에서 올이 풀리듯, 촘촘히 엮여있던 기억이 흙냄새를 따라 하나, 둘 풀어지고 있다.
대학 생활에 아직 어설펐던 1학년 봄이었다. 연희관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이른 아침 잠시 왔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한 시간의 공강. 선뜻 건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비 오는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만 해도 눈부시게 피어있던 하얀 목련 꽃잎이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한기가 목 뒤로 파고들었다. 커피 자판기가 있는 안쪽을 돌아보았다. 입에 담배를 문 채, 종이컵을 들고 돌아서는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다시 돌리는 순간, 내 옆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아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통한 우리 둘은, 청송대를 둘러 동문으로 난 길을 걸어, 한 카페를 찾았다. 걷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비 오는 거리가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서둘러 커피를 시켰다. 좀 더 머물고 싶은 유혹이 없지 않았지만, 당시 수업이 돌아가는 사정을 들고꿰지 못했던 우리는, 커피의 따듯함이 몸 안에 퍼지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제 앉아 있었던 시간은 길어 보았자 20분 남짓. 처음부터 시간이 빠듯하다는 걸 계산했음에도, 굳이 빗물에 차여가며 그 길을 걸어 나간 이유는 단순했다. 차분히 세상을 변화시키며 내리던 봄비. 그렇게 봄비가 내리던 그 날 그 순간만큼은, 담배 냄새로 전 연희관 로비나 빛이 들 틈이 없어 늘 싸늘했던 요업관─지금은 없어진, 연희관 뒤에 간식과 커피를 팔던 곳─을 벗어나,
따뜻한 커피에 몸을 덥히고 싶었다. 수업 시작 10 여분을 남겨 놓고 돌아오는 길. 멀리 보이는 청송대를 둘러 난 길은 길고도 길었고, 오르막길을 잰걸음으로 걸으니 숨이 차왔다. 이렇게 공강을 이용한 호기로운 나들이는 그날로 끝이었다.
호되게 추웠던 캠퍼스의 첫 겨울이 가고 땅이 풀리면서, 마른 길과 진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빈 시간이 생기면 간단한 일을 보거나 중앙도서관을 찾았고, 어쩌다 계절의 유혹을 받는 날엔, 뜻이 맞는 친구들과 발길이 닿는 곳에 스치듯 머물곤 했다. 당시 학생인 우리는, 반세기 앞서 이양하 교수가 신록의 매력을 음미했던 공간을 보지 못했고, 설사 그럴 안목이 있었다 해도 누릴 겨를이 없었다. 갑자기 날아드는 최루가스를 피해야 했고,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도 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현실과 이상의 틈을 메우기에 늘 바빴다. 학회모임─책을 읽고 발제와 토론을 하던 학과 내에 있던 모임─뒤풀이로 찾곤 했던 초저녁의 청송대는, 최루가스로부터 그나마 안전한 곳이었지만, 편하지는 않았다. 흙바닥에 돌을 대충 괴어 놓고 앉아서, 급히 머릿속에 집어넣느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다, 책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길을 찾지 못한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날이 대다수였다.
백양로에 최루가스 냄새가 빠지면서, 큰 걸개그림이 중앙도서관에 걸리는 횟수도 줄어들고, 많은 것이 변해갔다─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되었지만, 그 일련의 변화는 당시를 살았던 많은 이들의 삶의 방향을 바꿔 놓을 정도로 의미심장했다. 그 와중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연희관 건물 한구석에 있는 연구실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책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 헤매며, 굳어가는 몸을 풀거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때면, 청송대를 돌아 동문으로 난─몇 해 전 빗속에 시간에 쫓겨 숨 가쁘게 오고 갔던─길을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면─몸을 움직일 때 뇌도 부지런해진다는 걸 후에 알았지만─어수선하게 널려있던 생각이 정리되곤 했다. 하지만 덜 여문 생각을 안고 나선 산책길에, 가끔 올려다본 청송대 소나무는 눈으로 다다르기에도 힘들게 높았다. 그러다 졸업을 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학교를 방문했다. 익숙한 듯한 낯섦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볼 일을 마치고 나가는 길, 차창 옆으로 진초록의 울타리 같은 숲 하나가 짧게 지나갔다. 청송대였다. 그래, 나무마다, 솔잎 수만큼이나 셀 수 없이 오간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영원히 품고 있을 청송대는, 안으로 들어가 찾아보지 않으면 그 진수를 알 수도 없고, 때가 아니면 누릴 수도 없는, 그런데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실상이 보이지 않는 울타리 숲이었다.
빗소리가 잦아들고, 풀어졌던 기억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아직은 이리저리 풀어진 기억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언젠가 풀렸다 돌아가기를 반복하면서, 엉뚱한 자리로 돌아간다거나 다른 기억과 뒤섞여, 사실과 다른 기억으로 남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아니, 벌써 그렇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뇌는 제 편한 대로 기억을 짜 맞추는 성향이 있다고 하니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오늘과 똑같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한밤중 비에 끌려 나온 청송대를 둘러싼 기억은, 상황적 한계를 넘어 사물을 보고 이해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재차 확인시키고 돌아갔다. 조금만 지나면 어제의 문이 완전히 닫힐 시간이다. 어서 가서 눈을 감아야겠다. 눈을 뜨면, 겹겹이 쌓인 참나무 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물방울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숲으로 가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