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숲
그 오래된 숲은 생동하는 어린 생각들을 품어주는 곳이었다. 숲이 품은 과거는 편견 없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상처와 기쁨의 상징이 되었다.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기억해 내기 전에 이 숲이 가진 셀 수 없이 많고 많을 이야기들에 대하여 상상해 본다. 시인과 몽상가와 벗들과 내가 존재했던 숲. 숲은 그곳에 그대로 있지만 그 속의 이야기들은 시간과 공간과 감성에 따라서 현재 진행하거나 사장되었을 것이다.
연연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특정 공간에 대한 큰 애정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억 속 저편의 어떤 낡은 것을 끄집어 내었을 때,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 시절의 정취가 떠오르면 안쓰러운 생각과 회한의 감정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경험하는 것이 많아지면서 섬세하고 강렬하게 기억되었을 어떤 일도 이제는 더이상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고는 한다. 아마도 그래서 그때의 누군가가 그 순간만 가질 수 있었던 생각과 감정들이 오히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청송대와 꽤 가까운 연희관에서 연세 시절을 보냈다. 동문에서 하숙을 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매일 매일 숲을 가까이한 시간들이 있었다. 한 때는 일상적이었던 공간이 상징적인 장소가 되고 나니 그 시간들 속에서 어떤 생각을 품고 하루 하루를 살아내었는가 생각한다. 그 숲을 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각인하는 일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까. 그때의 어린 나도 지금의 조금 더 삶을 살아낸 나도 (생활 방편을 구하는 데는 익숙한 사람이 되었을 지라도) 삶을 대하는 태도는 그렇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쳇바퀴 도는 하루 만큼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일상의 공간이었고, 계절이 깊어지는 어느 날에는 경외감으로 오감에 풍경의 조각을 남기는 장소이기도 했다. 어느 때는 음습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어 마음 먹고 쉬려다가도 금방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방문객으로 소란할 때는 나 역시 뜨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북함에 무안해져서 그냥 지나쳐가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청송대를 떠올릴 때 가지는 가장 큰 정조는 이십대 초반 가졌던 일상의 공간을 추억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그 숲에 앉아서 나무 그림자의 조각을 훑었고, 벗과 점심을 먹었고, 어떤 문화 인류학 수업 시간에 어설픈 몸 동작을 따라했고, 도토리를 줍는 다람쥐와 도토리를 줍지 못하게 호통 치는 경비 아저씨를 관찰했다.
이야기로 가득했던 그 숲에서는 여전히 어떤 모종의 일들이 일어나고 기억되고 잊혀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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