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욕심이 많던 나는 학교 안의 공부뿐 아니라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내고 싶었다. (물론 공부에 대한 욕심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학회, 노래 등 여러 동아리에 동시에 가입했고,
다른 성향들에도 불구하고 모두 단과대학 안의 동아리였기 때문에
쟤는 원래 그렇구나, 정도로 서로 용인해주었다.
내가 주로 활동하는 요일만 잘 조정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학회에서는 자유롭게 토론하고 논쟁하며, 때로는 다투기도 했다가
뒷풀이에서 시원하게 속을 풀면 되는데,
노래, 그것도 수요일마다 열리는 신과대학 채플에서 특순을 맡는 찬양 동아리에서는
그러한 학회식의 변증법적(?) 관계개선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학회에서는 평범한 내가 찬양 동아리에서는 늘 날이 서서 사람들에게 직설, 독설하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내가 활동을 덜 했다면 모를까, 나는 의욕이 넘쳐서
콘서트를 위해 직접 노래를 쓰기도 하고, 모임시간에도 늘 일찍 가 있었다.
할 일을 하면서 할 말을 하되, 수위를 조절하지 않는 신입생 때문에
결국은 찬양 동아리 회장이 개입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97학번이던 회장은 어느 오후에 나를 데리고 청송대로 갔다.
나는 무악학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청송대를 늘 지나쳤지만,
회장 형은 내가 가지 않았던 청송대 안쪽으로 데려갔다.
밖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안쪽에는 나무가 크게 우거지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서 깊은 숨을 몇 번 호흡하고,
형의 첫 말은
"생각보다 그렇게 무성하지는 않지? 여기서 산림예찬이라는 아름다운 글이 나왔다니..."
우리는 둘 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형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나를 타이를 말을 찾고 있었고,
나 역시도 내가 어떻게 대답하면 나의 옳음을 주장할 수 있을까에 집중했었으니까. 우리의 위화감은 그런 각자의 속내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형은 늘 그렇듯 조곤조곤한 말투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 같다.
나는 나의 태도를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는 형의 온화한 태도에 누그러졌다.
잘해보자, 네, 하하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위화감을 안고 내려와서
대화를 복기한 후에야 "신록예찬"이 "산림예찬"이 된 것 때문에 위화감이 들었음을 깨달았다.
못된 새내기는 그것을 동아리 날적이에 기록해서 형의 우아한 실수를 박제했다.
사실 그 이후로 내가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날을 세우고, 공격적인 말들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한편
가을 콘서트를 완벽하게 올리고 싶어서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매달리기도 했다.
그 다음해까지 두 번의 콘서트를 올린 후에
회장 형은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갔고, 나는 찬양 동아리를 나가 연극 동아리로 옮겼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요즘도 SNS를 통해 가끔씩 형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산림예찬'을 떠올리며 미소짓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짙어지는 것은
형의 말실수와 위화감에 긴장한 우리보다는
생각보다 나무가 듬성듬성한 모습이었던 청송대,
푸르름으로 가득하기보다 오히려 허전한, 비움이 있었던 숲,
여유를 두고, 거리를 두어 나와 남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던 그곳. 결국, 신록예찬의 푸르름은 숲과 나무가 아니라 다듬어지는 우리들의 모습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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