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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흩어진 기억들이 하나로 모이는 숲 2021-02-2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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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는 도시입니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많은 것들이 변하고 사라져가는 요즘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청송대의 숲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숲은 떠들썩한 세상과는 달리 언제나 조용히 그대로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존재하는 작은 숲을 우리는 청송대라고 부릅니다. 안산 자락의 작은 구릉지대인 청송대의 고즈넉한 소나무 숲은 누군가가 그곳을 청송대라고 부르기도 훨씬 전부터 거기 그렇게 있었을 것입니다. 연세대학교의 숲은 꽤 오래전부터 이 땅에 있었습니다. 최초 2층짜리 목조 건물인 치원관(致遠館)이 세워지고 헨리 머피(Henry Killian Murphy)가 신촌에 조선 기독교 대학을 설계하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입니다. 수경원(綬慶園)이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헨리 머피는 조선 기독교 대학 캠퍼스를 신촌에 설계할 당시 캠퍼스 동쪽의 숲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다녔던 예일대 북쪽의 뉴헤이븐 East Rock Park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대학의 초기 캠퍼스 설계 당시에서도 청송대는 별 다른 건축물 없이 교수 사택 지구 북쪽의 한가한 소나무 숲으로 온전하게 자연 상태 그대로 남겨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에도, 신라 도선국사가 지금의 봉원사의 전신인 반야사般若寺를 짓기 훨씬 전에도, 심지어는 수경원 터에 있다는 고인돌이 존재하기 이전 먼 옛날에도 지금 모습과 비슷하게 우리 곁에 존재했었을 것입니다이 숲은 또한 근현대사에서 이 땅의 여러 불행한 사건과 사고들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6.25 때는 남침한 인민군들이 대학 건물을 방어기지로 사용하기도 했고, 그래서 한국군 해병대와 미5연대가 서울 수복을 위해 이 숲에서 마지막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적도 있습니다. 그 결과 19509월 마지막 주에 연희동 88고지(세브란스 북쪽 야산)에서는 소나무 숲의 바람소리와 함께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무수한 젊은이들의 피가 이 숲에 뿌려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청송대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오래도록 함께 했던 매우 역사 깊은 장소입니다. 지난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강 북쪽, 북한산 남쪽의 낮은 구릉지대였던 서울은 계속 커지고 복잡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북한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도심의 숲이 빠르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만 그나마 청송대의 숲은 대학의 교정 내에 존재했던 탓에 지금까지 거의 자연 그대로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헨리 머피씨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난개발의 완충지대이자 서울 중심부의 허파로서,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와 기억들의 보존 장소로서 청송대가 현재 우리 곁에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 된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청송대가 역사가 깊은 장소이고 서울의 허파라는 이유만으로 오래도록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매우 개인적인 이유로 청송대가 잘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연세대 재학생이나 졸업생도 아니고 근처에 사는 주민도 아닙니다만 청송대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청송대의 숲이 잘 보존되기를 멀리서나마 바랍니다. 비록 저는 연세대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연세대학교와 나름 인연이 깊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두 분 모두 연세대 졸업생이십니다. 돌아가신 부친은 법학과 59학번(학사장교 후 65년도 졸업)이셨고, 아직 살아계신 어머니는 국문학과 66학번이십니다. 아버지는 고시 공부 도중 건강이 나빠지고 머리털이 빠져서 할머니가 만류하는 바람에 중도에 그만두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옛날 동문쪽에 있었던 낡은 법현학사가 생기기도 훨씬 전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어머니는 국문과를 졸업 후 등단하고 시인이 되셨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생전에 연대생으로서 4.19 데모 때 맨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있었다, 앞 두 줄에서 학생들이 총에 맞았다는 무용담을 가끔 이야기 하곤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쇼펜하우어를 읽고 방황하다 연대 국문과에 입학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 덕분에 어린 시절 연고전 중계를 하면 항상 연세대학교를 응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청송대를 개인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저의 아내 때문입니다. 연세대는 부모님의 모교이기도 하지만 저와 아내와의 추억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제 부인도 연세대 불문과 학생이었습니다. 도서관학과를 복수 전공했고 교직을 이수했기 때문에 학교를 꽤 오래 다녔습니다(구조적으로 매우 낡았던 흰색 교육대 건물에서 틈틈이 교직수업을 들었던 걸로 기억함). 저는 당시에 집사람을 만나기 위해 수업이 있는 날에는 연대에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청송대 숲에서 아내를 기다렸습니다. 그 시절 저는 그 곳에서 조용히 명상도하고 낮잠도 잤습니다. 도토리 모으는 다람쥐도 구경하고 개울가에서 물 마시고 목욕도 하는 새들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청송대는 짜장면 배달도 안되는 구역이라 식사를 하거나 떠드는 학생들도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 청송대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학기 중에는 집사람의 수업이 끝나기 1-2시간 일찍 청송대 작은 개울가 벤치에 앉아서 남쪽 숲을 조용히 바라보곤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 사람(당시엔 여자친구)을 기다리며 어김없이 청송대의 개울가 옆 시멘트로 만들어진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곤 했습니다. 돌아보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부인과는 졸업 무렵 결혼 하였습니다. 저를 제외한 저의 가족 구성원은 모두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지만 저는 연세대학교 및 청송대와 인연이 깊습니다. 

 그 무렵 제가 청송대 숲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은 숲으로서의 생태학적인 그 공간 자체가 특별히 저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청송대를 방문할 때마다 저는 어린 시절 살았던 나무가 많이 있었던 집 마당을 떠올리곤 합니다. 저는 신촌 캠퍼스 근방의 북아현동(굴레방다리 근처)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제가 자랐던 북아현동의 집과 연세대학교의 청송대는 모두 안산 아래의 나지막한 구릉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봉원사 복주물로 약수를 뜨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아현동 성당 아래에 나무와 꽃들이 우거진 큰 마당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동네의 위도는 37.559(북아현동 주민센터 기준)입니다. 연세대학교 청송대의 위도는 37.566입니다. 경도면에서도 청송대가 126.940이고 북아현동 집 근방의 경도가 126.957입니다. 제가 살았었던 집과 청송대 숲과의 거리도 대략 직선거리 1.6km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특히 위도상 청송대가 제가 살았던 집과 거의 동일하여 연세대학교 교정 숲의 식생은 제가 어린 시절 보고 자랐던 할머니집 앞마당의 식생과 거의 유사합니다각각의 숲은 저마다 고유한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커다란 나무도 나무지만 그곳의 수많은 작은 나무들과 풀들은 그 숲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같은 소나무 숲일지라도 분위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혹은 비슷한 종의 소나무 숲일지라도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소나무 숲과 서울 안산의 소나무 숲의 느낌이 다른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같은 종류의 나무로 된 숲일지라도 풀들이나 잡목 등 고유한 기초 식생은 위도와 경도에 따라 달라집니다제가 어린 시절 자랐던 그 집은 지금 흉물스러운 다른 건물이 들어섰고 이제는 나무고 뭐고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서울은 모든 것이 매우고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청송대의 숲은 시간을 거슬러 아직까지 그대로 제 곁에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언제든 청송대 숲에 가면 저는 어린 시절의 냄새를 그대로 맡을 수 있습니다. 개울가에 앉아 있으면 잊고 있었던 기억과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코로나가 한참이던 지난 2020년 가을 저는 청송대에 아내와 함께 다시 가 보았습니다. 숲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동문과 백양로 사이를 걸어 다니는 학생들로 붐볐을 길이지만 코로나로 한가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숲은 그 모습 그대로 같은 숲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쉴 새 없이 변하는 요즘이지만 청송대만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거기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초연히 넘겨 왔듯이 청송대는 코로나 역시 조용히 스쳐 보내리라 생각했습니다텅 빈 가을 청송대 숲 벤치에 앉아 저는 그렇게 흩어졌던 추억들을 주섬주섬 모아들고 돌아왔습니다. 저에게 청송대의 작은 숲은 개인적인 기억들이 만나는 공간입니다. 그것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흩어져 있던 인간들의 추억이 하나로 모이는 공간입니다. 잊고 있었던 자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떠도는 기억들이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하나로 모여 있는 숲 입니다. 그래서 저는 청송대가 지금 모습 그대로 영원히 잘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렇게 남아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제게 큰 위안을 줍니다. 

 


#청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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